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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라덴 아들 함자 빈라덴이 알카에다 권력 승계..美 현상금 11억원 걸어. "아버지 사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공격 경고" 빈 라덴의 부인 은?

"아버지 사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공격 경고"

오사마 빈라덴의 아들 함자 빈라덴이 최근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CNN이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 국무부 관계자는 지난 2월28일 "함자 빈라덴이 알카에다의 지도자로서 권력을 승계받고 있다"며 "그는 최근 인터넷을 통해 음성과 영상 메시지를 내보내 미국과 서방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호소하고 있다"고 밝혔다.

함자 빈라덴은 현재 30세에서 33세 사이인 것을 미 당국은 추청하고 있다.

오사마 빈라덴은 지난 2011년 5월 파키스탄 은신처에서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됐다.
국무부는 "함자 빈라덴이 아버지 사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에 대한 공격을 경고했다"고 덧붙였다.

미 국무부는 그의 거처와 관련한 정보 제공에 대한 현상금을 100만달러(11억2000만원)으로 인상했다.

오사마 빈라덴 사망 당시 파키스탄의 은신처에서 압수한 물품들을 통해 그의 아들인 함자 빈라덴을 후계자로 대체하기 위해 훈련시키고 있다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미 관리는 덧붙였다.

함자 빈라덴은 2001년 9·11테러 당시 여객기를 납치해 미국을 공격했던 모하마드 아타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UN 유엔 회원국들은 함자 빈라덴의 자산을 동결하고 여행금지, 무기거래 금지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 받았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는 최근 함자 빈라덴에 대한 시민권을 박탈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사마 빈라덴, "휘트니 휴스턴을 사랑했다."

오사마 빈라덴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무함마드 빈 아와드 빈 라덴 (아랍어: أسَامَة بِنْ مُحَمَّدْ بِنْ عَوَدْ بِنْ لَادِنْ 우사마 빈 무함마드 빈 아와드 빈 라딘[*], 영어:Osama bin Laden, 1957년 3월 10일 ~ 2011년 5월 2일)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난 석유 재벌이었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적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이다. 빈라덴은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 DC에 행해져 최소 2996명을 숨지게 한 9.11 테러의 배후로 간주되고 있다.

제로니모 작전을 통해서, 2011년 5월 1일(미국 현지시간, 파키스탄 시간으로 5월 2일)에 파키스탄 아보타바드 에서 미국 해군(네이비 실)의 데브그루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생애 1957년 3월 10일 ~ 2011년 5월 2일
출생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사망지 파키스탄 아보타바드 복무 알카에다 막타브 알키다마트
근무 알카에다 지도자


유년기와 교육

오사마 빈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사우디 왕가의 친구이자 부유한 사업가인 무함마드 빈라덴과 그의 10번째 아내 하미다 알아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1998년인터뷰에서 오사마는 자신의 생일이 1957년 3월 10일이라고 밝혔다. 생모인 하미다 알아타스가 2m가 넘는 장신이었고, 오사마 빈 라덴은 그런 어머니를 닮아 195cm의 장신이였다.

오사마의 부모는 그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혼하였고, 어머니는 무함마드 알아타스와 재혼하였다. 이 부부는 4명의 자녀를 두었고, 오사마 빈라덴은 이 4명의 이복동생들과 함께 새아버지의 집에서 살았다.

오사마는 독실한 와하브바 이슬람교도로 자라났다. 1968년부터 1976년까지 그는 우수한 학생들을 교육하는 알타게르 시범학교를 다녔으며, 킹 압둘라지즈 종합대학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공부 하였다. 

일부 보고에 따르면 그는 1979년 토목 공학, 1981년 행정학 학위를 받았다고도 한다. 그는 부지런한 학생이었으며, 일부는 그가 3학년 때 학위를 마치지 않고 자퇴하였다고도 한다. 대학에서 오사마 빈라덴의 관심은 종교였으며, 코란과 같은 이슬람교 관련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는 시를 쓰거나 독서하는 것을 즐겼는데, 버나드 로 몽고메리나 샤를 드골의 저서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한때 축구를 하기도 하였는데, 주로 맡은 포지션은 중앙 공격수였으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프로 축구팀인 아스날 FC의 열성팬이었다고 한다

사적인 인생

1974년 18세가 된 오사마 빈라덴은 라타키아에서 나지와 가넴과 결혼하였는데, 나지와는 2001년 9.11 사건을 앞두고 그와 이혼하였다.

빈 라덴의 부인과 빈 라덴 사진

그는 그 외에 5명의 여인과도 결혼하였는데, 1983년 하디자 샤리프(1990년대 이혼), 1985년 하이리아 사바르, 1987년 시함 시바르, 2000년 아말 알사다, 그리고 시함과 아말 사이에 신원이 불분명한 여인과 결혼하였고, 이들과의 사이에 20명에서 26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빈라덴의 자녀들은 911 테러 이후 대부분 이란으로 도피하였고, 이란 정부는 이후 이들의 거주지를 관리하고 있다.

오사마 빈라덴의 아버지 무함마드는 1967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였는데, 이는 미국인 조종사가 착륙 실수를 해서였다.

오사마의 이복 남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살렘 빈 라덴이 빈 라덴 가문을 이끌게 되었지만, 그도 1988년 미국 텍사스주의 샌안토니오에서 비행중 비행기가 전선줄에 걸려 일어난 사고로 사망하였다.

FBI는 오사마 빈라덴이 193~198cm의 장신이며 약 75kg의 마른 체형이라고 기술하였다. 그를 인터뷰한 미국의 기자 로렌스 라이트는 그가 호리호리한 체격이지만 특별히 키가 크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미국의 작가인 로렌스 라이트에 따르면 그는 올리브색 눈에 왼손잡이이며, 걸을 때에는 대부분 지팡이를 사용하였다. 그는 주로 평범한 흰색 터번을 착용하였는데, 그 전에는 보통 사우디 전통 남성 모자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며 온화한 성품으로 묘사되었다

오사마 빈 라덴 이름

아랍어나 아랍 이름을 라틴 문자로 옮기는 국제 표준은 없지만 빈라덴의 이름은 대개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라는 형태로 표기된다. 미국 FBI나 중앙정보국(CIA) 및 기타 미국 정부 기관들은 "우사마 빈 라덴"(Usama bin Laden) 또는 "우사마 빈 라딘"(Usama bin Ladin)으로 표기하는데, 둘다 약자로 "UBL"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o나 e를 사용하는 것은 빈라덴이 많은 시간을 보낸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로 파슈토어식의 표현이다.

빈 라덴 사살 당시 동영상

아랍어식으로 그의 이름을 풀이하면 "오사마, 무함마드의 아들, 아와드의 아들, 라덴의 아들"이 된다. 빈라덴의 아들 오마르 빈라덴에 따르면 그의 가문에 전해지는 성은 "알카타니"(아랍어: ‎القحطاني, āl-Qaḥṭānī)인것으로 보이는데, 빈라덴의 아버지 무함마드 빈라덴은 공식적으로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사마 빈라덴의 추종자들은 여러 이름으로 그를 호칭하는데, "에미르"(الالمجاهد, al-Amīr),"셰이크"(الشيخ, aš-Šayḫ), "셰이크 알 무자히드"(شيخ المجاهد, al-Muǧāhid Šayḫ), "사자"(حج‎, Ḥaǧǧ), "독재자"등이 사용된다



사상과 이념

미국 중앙정보부에서 오사마 빈라덴을 추적해 온 마이클 셰어에 따르면, 오사마 빈라덴은 미국의 대외 정책이 중동의 무슬림을 억압하고 살해하며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오사마 빈라덴은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상관없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싫어한다”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바 있다.

빈라덴은 또한 샤리아를 회복하는 것만이 무슬림 세계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라 말한 바 있다. 그는 샤리아만이 이슬람 세계에서 “범아랍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등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지하드라고 선언된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믿음은 흔히 사이드 쿠트브가 주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쿠트비즘이라고 불린다.

빈라덴은 무하마드 오마르가 이끌었던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이야말로 “유일한 이슬람 국가”라고 하였다. 빈라덴은 미국이나 다른 이슬람권이 아닌 다른 국가들에 대항하여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동반한 지하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였으며, 특히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을 중동에서 반드시 축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미국인들이 “동성애, 술이나 마약의 이용, 도박, 그리고 고리대금과 같은 부도덕하고 사악한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하였다.

빈라덴의 이데올로기 가운데에는 여성이나 어린이와 같은 무고한 시민들이라 할 지라도 지하드의 공격 목표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빈라덴은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는 “유대인이야말로 고리대금업자의 최고봉이고, 변절의 우두머리이다. 그들은 지금 세계에서도 그리고 다음 세계에서도 당신들을 결코 그냥 두는 법이 없다”고 유대인을 비난하였다.

빈라덴은 미국과 이스라엘과 같은 소위 “이슬람의 적” 목록에 시아파 무슬림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추가하였다.

빈라덴은 종교 활동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기술에 대해서는 복합적인 생각을 보였다. 빈라덴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 역학과 식물을 이용한 유전 공학에 관심을 보였으나 냉각수는 거부하였다.

빈라덴은 자신을 그의 관점을 실현하기 위해 테러리즘을 방법으로 택한 학자라고 여겼다. 빈라덴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정보 기관과 언론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지목되었다.

빈라덴의 전략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항할 때 부터 자신 보다 강력한 적을 상대로 소모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빈라덴은 지하드를 수행하는 무슬림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적국은 시간이 갈 수록 경제적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보았다. 알카에다의 군사 교본에는 빈라덴의 이러한 전략 목표가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다

범죄 혐의

1998년 3월 16일 리비아는 지난 1994년 3월 10일 리비아에서 독일 연방정보부 직원을 포함한 2명의 독일인을 살해한 혐의로 빈라덴과 기타 3명에 대한 첫 인터폴 수배령을 내렸으며, 빈라덴이 사망하였을 당시에도 리비아 정부는 이 수배령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사마 빈라덴은 1998년 6월 8일 미국에서도 기소되었는데, 1995년 11월 14일 미국이 운영하는 리야드의 사우디아라비아 국가경비대 훈련소 앞에서 폭탄 트럭으로 5명의 미국인과 2명의 인도인을 살해한 혐의였다. 당시 빈라덴의 혐의는 미국의 방어시설을 공격하였다는 것이었으며, 아울러 그가 알카에다라는 테러 조직을 이끌고 있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당시 빈라덴은 자신의 개입 여부는 부정하였지만 공격 자체는 이슬람 교도로서 훌륭한 행위라고 칭송하였다.

1998년 11월 4일 오사마 빈라덴은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국외 미국인을 살해하고, 연방 시설을 공격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의 미국 대사관 공격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빈라덴이 개입되었다는 증거는 전직 알카에다 조직원의 자백과 위성 전화 녹음, 그리고 알카에다의 조달담당자 지야드 할릴이 그에게 사준 휴대전화였다.

빈라덴은 이 사건으로  1999년 6월 7일 '10대 수배자'에 이름을 올렸으며, 역대 456번째였다. 암살 시도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대한 범인 신병 인도요청이 실패로 끝나면서, 1999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유엔에 범인 인도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2001년 10월 10일 빈라덴은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가 공포한 22대 FBI 수배 테러리스트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빈라덴은 FBI 10대 수배자와 22대 테러리스트 목록에 모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물로 남았다.

여러 차례의 범인 신병 인도 요청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은 오사마 빈라덴의 신병 요청을 거부하였다. 2001년 10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자, 탈레반은 미국이 폭격을 중단하고 빈라덴의 9.11 테러 연계 증거를 제출하는 대가로 빈라덴을 제3국의 법정에 세우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에 조지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가 무죄인지 유죄인지를 논할 필요는 더 이상 없으며 우리는 그가 유죄라는 사실을 안다'라는 대답으로 탈레반의 제안을 일언지하 거절했다


죽음

2011년 4월 29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파키스탄 아보타바드 인근 지역을 수색하여 빈라덴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에 서명하였다. 이 작전 이름은 '넵튠 스피어 작전(Operation Neptune Spear)'였으며, 빈라덴을 가리키는 코드명은 '제로니모'(Geronimo, 아메리카 원주민 아파치족 추장 이름에서 유래)였다.

당초 빈라덴의 위치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지대, 파키스탄 연방 관할 부족지역 사이로 알려졌지만 그는 사실 이로부터 160 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보타바드의 시가 25만 달러 상당 3층 저택북위 34° 10′ 9.63″ 동경 73° 14′ 33.33″에 있었다. 그의 저택은 파키스탄 사관학교 남서쪽 1.3km위치였다. 구글어스를 보면 해당 저택은 2001년 위성 사진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2005년 위성 사진에는 존재한다.

2011년 5월 1일(파키스탄 표준시간 기준으로 5월 2일워싱턴 D.C에서 버락 오바마는 오사마 빈라덴이 사살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미군에 의하여 수습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향년 54세. 미국정부는 미국 해군 특수전 개발 그룹 소속 네이비실 6팀 24명이 합동 특수 작전 지휘부(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와 CIA 공조 하에 2대의 헬리콥터를 이용해 빈라덴의 저택을 급습하였다고 하였다.


오사마빈라덴의 시체 사진은 속임수?


이 작전으로 빈라덴과 남성 3명, 여성 1명이 사살되었으며 미군의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헬리콥터 1대가 기기 고장으로 불시착하였으며, 네이비실 팀에 의해 현장에서 폭파되었다. 오바마는 언론 발표에서 미군이 민간인의 피해를 야기하지 않기 위해 만전을 기하였다고 하였다. 미국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 공격은 파키스탄 측에 통보 없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작전 당시 빈라덴은 머리와 가슴에 치명상을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빈라덴의 죽음은 현장 사진과 함께 '제로니모 작전 중 사살'(Geronimo E-KIA)이라는 코드로 보도되었다. 작전 소요 시간은 정보부의 현장 수색까지 포함하여 40분이 걸렸다. 빈라덴의 유해는 수습되어 생명 안면 인식 시험이 이루어졌으며, 부차적으로 유전자 검사까지 시행되었다. 그의 시체는 땅에 매장할 경우 추종세력들이 그 곳을 성지로 정하고 테러활동을 원활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라비아 해에 수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